
중·고등학교를 외국에서 졸업하고 귀국해 국내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청년이 있었다. 로스쿨 입학에 몇 번 도전했다가 실패한 후에야 취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그때 나이가 이미 스물아홉이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토익·토스 만점’이라는 막강 스펙을 믿고 자신있게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다. 로스쿨 입학만큼이나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또다시 몇 번의 고배를 마신 끝에 다행히 한 대기업에 합격했다.
그런데 그는 신입 사원 연수를 받던 중 어렵게 들어간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도저히 회사원으로 평생 살 자신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면서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내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이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몇 년 전 초등학생이던 조카가 내게 불쑥 던진 질문이 떠올랐다.
“이모부, 그래도 이모부는 죽을 때까지 일하고 싶지는 않죠?”
이 질문이 나오게 된 계기는 이랬다. 하루는 처가에 갔다가 여러 명의 친척 아이들과 나만 있게 됐다. 아이들은 저희끼리 뛰어놀다가 이내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방에 들어가 책을 집어 들었다. 첫째 준영이가 두세 살 때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문만 열어둔 채 벽에 기대어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경력 초기만 해도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 그러다 1인 기업가로 변신한 후 책을 많이 읽게 됐다. 누구보다 부족함을 많이 느꼈기에 늘 책을 가지고 다니며 틈만 나면 읽곤 했다. 그때는 단 5분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짧은 자투리 시간이라도 그냥 흘려보내기가 아까웠다.
그때 앞서 말한 조카가 심심했던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모부, 책 재미있어요?
“응, 재미있어.”
“이모부, TV에서 그러는데 성공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된대요.”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줄곧 조카의 질문으로 이어져나갔다. 조카가 이런저런 질문을 할 때마다 나는 귀찮아하지 않고 매번 답을 해줬다. 그러다 이런 질문도 받았다.
“이모부는 존경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럼, 존경하는 사람이 있지. 다섯 분이란다.”
“와! 다섯 명이나요? 어떤 사람들이에요?”
“첫 번째는 벤저민 프랭클린이야. 혹시, 이름 들어본 적 있어?”
“아뇨.”
“그래, 모를 수도 있겠다. 그럼 혹시 번개를 막아주는 기구가 뭔지는 아니?”
“피뢰침이요.”
“그래, 맞아. 피뢰침이야. 그 피뢰침을 개발한 기상학자이자 과학자가 바로 벤저민 프랭클린이야. 처음에는 인쇄 기술자로 일을 시작해서 경영자가 됐고, 나중에는 작가로서 강사로서 정치인으로서 다양한 삶을 살아간 분이지. 이모부가 꿈꾸는 다양한 삶을 살아간 분이라 첫 번째로 존경하는 인물이야. 이모부는 그 사람이 쓴 자서전을 읽고 젊은 날의 나쁜 습관들을 고치게 됐단다.”
“아~ 그럼 두 번째로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예요?”
“피터 드러커라는 분이야. 경영학자인데,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라 불릴 만큼 다양한 활동을 했단다. 경영학을 누구나 배워야 할 교양으로까지 발전시킨 사람이지.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경제 정책에도 참 여했고, GM이나 P&G 같은 글로벌 기업들을 대상으로 경영 컨설팅도 진행했어. 그리고 책을무려 서른 권 가까이나 썼단다. 죽을 때까지 글쓰기와 강연을 멈추지 않았어.”
바로 여기까지 답했을 때 조카가 그 인상 깊은 질문을 했던 거다. “이모부, 그래도 이모부는 죽을 때까지 일하고 싶지는 않죠?”라고. 처음 이 말을 듣고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어떻게 답해주는 게 좋을까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해줬다.
“아니, 이모부는 죽을 때까지 일할 거야. 직업이란 나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멋진 소명이거든. 이모부는 일을 통해 성장했단다.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게임이 바로 ‘성장’인데, 일하지 않고는 성장하기 어렵지. 그러니 너도 커서 어떤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해 성장해나가겠다는 각오와 태도로 임하면 좋겠어. 그래야 네가 원하는 즐거움도 얻 을 수 있단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어린 조카는 부모나 주변 어른들의 영향으로 ‘일은 재미없는 것,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 건 아닐까, 하는.
그런 면에서 부모가 가진 직업관은 그 어떤 진로 교육보다 중요하다.
직업을 바라보는 부모의 자세가 바로 서 있어야 성장해가는 자녀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세워진 직업관이 한 사람의 삶을 평생 좌우하기 때문이다. 일과 놀이를 단순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서는 안 된다. 세상을 그런 식으로 구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장기적으로 볼 때 경력 관리에 실패하기 쉽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진로 지도를 올바르게 해주고 싶다면, 직업 정보를 전하기에 앞서 부모 자신이 직업을 어떤 마인드로 바라보고 있는지부터 점검해봐야 한다. 아이들이 훗날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찾고 자기만의 경력을 성공적으로 구축해 행복한 삶을 영위해나가길 바란다면 부모가 긍정적 직업관을 갖고 그에 걸맞게 자기 일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를 바르게 보여야 한다.
그런데 이미 그런 시기를 지나 성인이 되고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라면 취업 문제를 풀기에 앞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직장이라는 일터 자체를 부정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것을 먼저 반추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의외로 많은 학생이 “직장이나 다니면서 그저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라고 말한다.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목표는 좋다. 그러나 왜 직장을 폄하하고 직장인을 폄하하는가.
특별한 일을 해야만 특별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평범한 일 속에서도 특별함을 찾아낼 수 있다면 더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비록 작은 직장에 다니고, 남들 볼 때 볼품없는 직업에 종사하더라도 자기 몫을 다해 일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이 세상 모든 일을 특별한 일과 특별하지 않는 일로 단순하게 구분해버린다면 인생은 더욱 꼬일 것이다. 특별할 수 있는 일도 스스로 특별하게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사람이 특별해 보이는 특정 직업으로만 몰린다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많은 사람이 특별한 직업을 원하지만 세상에 특별한 직업은 없다. 자기 직업을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어떤 직업을 가지든 그 일에 임하는 마음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앞의 사례를 통해 언급한 청년을 포함한 모든 청년이 부디 깨닫길 바란다. 아무리 평범한 일이라도 기꺼이 성실하게 수행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야말로 특별한 사람임을 거듭 강조 하고 싶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그 조카는 이제 어느덧 대학 다닐 나이가 됐다. 아직까지는 어떤 일을 해야겠다는 목표를 뚜렷하게 정하지 못했지만, 최소한 ‘일을 통해 삶을 배워보겠다’는 자세는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전보다 훨씬 성숙해진 조카에게서 청춘들의 꿈을 엿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