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이 길뿐, 다른 길은 생각해본 적 없어요!” [정철상의 따뜻한 독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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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이 길뿐, 다른 길은 생각해본 적 없어요!” [정철상의 따뜻한 독설] (8)
  • 뉴스앤잡
  • 승인 2022.03.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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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직장, 하나의 직업만 고집하는 청춘들

HR기업에서 근무할 때 채용 대행 업무를 맡은 적이 있다. ‘채용 대행’이란 기업이나 공공기관 등의 인사팀에서 진행하는 채용 업무 프로세스 중 일부를 외부 기관이 대신 진행하는 것을 말한다. 서류 전형이나 면접 전형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나는 공공기관부터 민간 기업까지 다양한 조직의 채용 업무를 수백 차례 대행했다.

 

기업이 자체 처리해야 할 채용 업무를 외부 대행으로 의뢰하는 목적은 

첫째 한꺼번에 몰리는 채용 업무를 외부 기관을 통해 분산하기 위함이고,

둘째 외부의 시각으로 지원자들을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함이며,

셋째 조직 내부의 인맥 유착을 근절하기 위함이다.

 

모 대기업의 신입 사원 공개 채용을 직접 대행하던 때였다. 부적합한 지원자들의 지원을 최소화하기 위해 나름 까다로운 자격 조건을 내걸어 입사지원서를 받았다. 그럼에도 10여 명 모집에 1,000명 이상이 지원했다. 조건이 우수한데 탈락한 지원자도 적지 않았다. 문의 전화가 꽤 걸려왔는데, 그중에는 같은 내용으로 전화를 수차례 반복해 채용 담당자를 피곤하게 만든 사람도 있었다. 서류 전형에서 이미 탈락한 그는 '도대체 채용 기준이 무엇이냐, 내가 떨어진 이유가 무엇이냐며 담당자를 윽박지르다가, 마지막엔 면접시험이라도 보게 해주면 안 되느냐'며 매달렸다.

직원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해당 지원자의 입사지원서를 자세히 훑어봤다. 모든 조건이 상위권이었다. 이런 지원자가 왜 서류 전형을 통과하지 못한 걸까 의아해하며 좀 더 꼼꼼하게 모집 공고와 입사지원서를 대조해봤더니 전공이 달랐다.

기업이 원한 조건은 ‘전기·전자 관련 학과 출신’이었는데, 그 지원자는 경상 계열 학과 출신이었다. 나는 기업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비전공자지만 유능해 보이는데 면접시험을 보고 나서 평가하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예상대로 “불가능”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해당 지원자에게 상황과 이유를 설명했다. 그런데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오히려 자기가 일을 얼마나 잘 수행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 권한도 없는 내게 설명을 계속 늘어놨다. 처음의 안타까운 마음은 다른 의미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뀌었다. 무수히 많은 직장 중에서 굳이 이 회사만 고집하는 그가 참 많이 답답했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한 공기업 채용 대행 업무를 맡고 있을 때 지원했던 K군이 기억에 남는다. K는 그 공기업에 들어가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대학 생활을 포함해 무려 7년이나 준비해온 명문대 졸업생이었다. 스펙도 실로 화려했다. 준수한 외모의 공대 인기 학과 출신, 해외 연수 경험, 토익 900점대, 일본어 중상급, 전문 자격증 2종 보유, 공모전 수상, 그밖에 다양한 사회 경험 등 모두가 바라는 스펙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K는 서류 전형에서 탈락했다.

여기까지 들으면 누구라도 의구심이 들 것이다. 당사자인 K는 오죽했을까. 앞서 얘기한 사례 속 주인공처럼 K 역시 채용 대행을 맡고 있는 우리 회사에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 담당자를 힘들게 했다. 면접만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애원하기도 하고, 협박조로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견디다 못한 담당자는 K의 마음을 돌려달라며 내게 전화를 연결했다.

처음엔 나도 K의 입사지원서를 보고 왜 탈락했는지 선뜻 원인을 찾지 못했다. 혹시나 싶어 모집 공고와 입사지원서를 비교해본 후에야 비로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학점이 0.01점 모자랐던 것이다. 모집 공고에는 ‘졸업 학점 4.5점 만점 기준으로 3.5점 이상인 자’라고 되어 있었는데, K의 졸업 학점은 3.49점이었다. 고작 0.01점 때문에 꼭 입사하고 싶은 곳의 서류 전형에서 탈락했다는 사실을 K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켜보는 내가 다 안타까웠다. 그 정도면 조직에 대한 열정도 있어 보이고, 괜찮은 인재로도 보여서 면접 정도는 보고 판단해도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인사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원자 K에게 일단 면접의 기회를 주고, 나중에 채용 여부를 결정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인사 담당자는 단호했다. 공기업인 만큼 더욱 공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면서, 그런 식으로 채용 기준을 허용해줄 수 없다는 거였다. 안 그랬다가는 자기 자리마저 위태롭다고 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이 K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위로했다. 그런데 K는 막무가내였다. 도대체 학점 0.01이 일하는 데 무슨 상관있느냐며, 무조건 면접을 보게 해달라고 졸랐다. 나는 공기업 특성상 어쩔 수 없으니 다른 좋은 기업들을 추천해주겠다고 했다. 그제야 K는 작년에도 그 공기업에 도전했다가 탈락했음을 고백했다. 올해도 안 되면 내년에 또 도전할 거라고 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미 졸업했는데 학점을 바꿀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그 공기업에서 채용 기준을 낮추겠는가. 목표가 뚜렷하다는 것도 좋고, 뜨거운 열정도 좋고, 도전 정신도 좋다. 하지만 기본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해당 기업이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게 상식인데, K는 너무나 맹목적으로 하나의 목표에만 꽂혀 매달리고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재도전은 자기 자유지만, 가능성 제로인 일에 아까운 시간과 열정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더구나 7년 전부터 그 공기업 입사를 준비했다는 사람이 어떻게 기본적인 입사 자격 요건조차 모를 수 있는지 반문하고 싶었다. 최소한 대학 재학 중 해당 조직의 채용 공고를 미리 보며 준비만 했더라도 이런 억울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K는 ‘꼭 그 회사에 들어가야지!’라는 마음만 먹고 열심히 이런저런 스펙 쌓기에만 몰두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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