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소기업을 첫 직장으로 삼은 청춘들은 조그만 회사에서 커리어를 출발한다는 게 못내 불만스러울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사실을 상기해보길 바란다. 대기업은 어느 정도 우열 순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게 현실이지만, 다행히 인생은 학교 성적처럼 꼭 우열 순으로만 풀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절박한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해나가는 사람이 결국 더 크게 성장한다는 점도 잊지 말자. 작고 열악한 환경에서 쥐꼬리만 한 박봉을 받으며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고 불평만 한다면 삶은 결코 더 나아지지 않는다.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교세라 창업자 이나모리 가즈오는 말했다. 만일 젊은 날의 자신이 입사 동기들처럼 조그만 기업에서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갔더라면 오늘날의 자신은 없었을 거라고. 그 시절 그는 조그만 중소기업에 동기 6명과 함께 취업을 했다. 근무 환경도 열악하고 시스템도 허술해서 다들 퇴사하겠다는 분위기였다. 그도 날마다 퇴사를 꿈꿨다. 그사이 동기들은 모두 퇴사를 해버렸고, 그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회사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려 하지 않고 피하고만 있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고, 결국 성과를 인정받았다. 그런 노력 덕분에 ‘교세라’라는 대기업을 일구는 데 필요한 기반을 크게 마련하게 된 것이다.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이 주관한 ‘담소’라는 강연회에서 만난 한 중소기업 경영자도 떠오른다. 학생들은 그에게 신입 연봉이 얼마나 되느냐, 조직의 비전은 있느냐, 대기업과 어느 정도 수준 차이가 나느냐, 직원들에게 어떤 보상을 해주느냐 등의 곤란한 질문을 쏟아냈다.
이에 그 경영자는 직원들이 입사하면 자기가 20년간 쌓아온 모든 지식과 기술을 허심탄회하게 나눠준다고 답했다. 특히 자기가 오랫동안 연구 개발해온 프로젝트의 기술을 완성해줄 직원이 있다면 자기 전 재산뿐 아니라 영혼까지 바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나는 그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인상 깊은 정도가 아니라 전율을 느꼈다. 자기 일을 지독할 정도로 사랑하는 그 중소기업 사장이 마냥 부러웠다. 그를 보면서 나도 제대로 된 사업체를 다시 한 번 꾸려보고 싶다는 열망이 새롭게 꿈틀거렸다.
대기업 입사에 모조리 실패했던 젊은 날의 나는 결국 중소기업에 취직을 했었다. 거기서 이런저런 어려움에 맞닥뜨리고, 그것을 해결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사실 사회생활을 하며 내가 배워야 할 모든 것은 중소기업에서 다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경우는 거래처와의 관계가 가장 어려웠다. 중소기업은 대기업과의 관계에서 소위 ‘을’의 입장이다 보니 큰소리 한 번 치기가 어려웠다. 직급이 올라가도 대기업 대리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상대적 위치가 낮은 입장이라 굴욕감을 느끼기도 했다.
기존 거래 선을 유지하는 편한 일만 하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새로운 거래처까지 개척해야 했다. 또 어떻게든 매출을 끌어와야 했다. 대기업들은 신문이나 방송에서 빵빵하게 광고를 때리는데, 내가 다닌 작은 기업에서는 그 흔한 인터넷 광고조차 여의치 않았다. 경쟁사와 차별화되려면 제품 기술력이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그런 기술력도 전혀 뒷받침되지 않았다.
규모가 작은 영세 기업이라 차량이나 교통비도 제대로 지원받지 못했다. 그나마 몇 푼 안 되는 경비 정산도 일일이 사장에게 가서 직접 보고해야 했다. 신입 사원이 회사 오너와 대면한다는 건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컴퓨터가 고장 나고 회사 비품이 떨어져도 모두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사무실 환경도 좋지 않았다. 통풍이 잘 안 되고 냄새나는 비좁은 오피스텔이어서 매일 출근할 때마다 내 처지가 한탄스럽고 부끄럽기만 했다. 그래서 사표를 늘 품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게 얼마나 광범위한 기회가 주어져 있는지를. 영업 개척, 고객 관리, 내부 업무 프로세스 개선, 새로운 프로젝트 수행 등 내가 속한 조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했다. 눈을 조금만 크게 떠보니 이전엔 보이지 않던 많은 것이 보였다. 그러면서 또 하나 깨달았다. 어떤 직장에 다니든 중요한 건 나 자신의 태도라는 걸.
그때부터 나는 ‘한번 해보자!’는 태도로 모든 일에 임했고, 생각지도 못한 스스로의 변화를 경험했다. 일단 작은 조직이라 겸손함을 가장 먼저 배울 수 있었다. 생존해야 했기에 성실함을 익혔고, 불안정했기에 절박함을 가질 수 있었다. 잡다하다 싶을 만큼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면서 앞으로 어떤 직무든 수행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더불어 어디서나 적응하고 변화할 수 있는 변화수용력을 배웠다.
큰 조직에서는 불가능한 경험도 해봤다. 사실 대기업에서는 경영자를 가까이서 보기도 힘들고, 조직 전체를 바라보기도 힘들다.
그런데 내가 있던 작은 조직에서는 경영자의 잘잘못과 성과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자 조직 전체의 구조적 문제점이 한눈에 들어왔고, 개선점을 찾아내 적용해볼 기회도 생겼다. 큰 조직이었다면 한 사람의 이 같은 역량이 빛을 보기 어려웠겠지만, 작은 조직이었기에 금방 빛을 볼 수 있었다.
이 모든 건 대기업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을 배움과 혜택들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익숙하지 않은 수많은 일을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닥칠 때면 힘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천천히 하나씩 해냈고, 그 덕분에 강한 집념과 근성을 키울 수 있었다. 나중에는 어떤 상황이 닥쳐도 스스로 생존해나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때의 경험과 깨달음 덕분에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살아남았다.
[... 다음 칼럼으로 계속]